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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일보>[항일현장에서 미래를 그리다] 경기독립운동기념관 건립 꿈, 우리가 빚진 독립지사들의 삶·정신 '기억의 공간'에 담자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2020-07-21 14:11:11
조회수 :
1,400회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2020-07-21 1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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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과 지역적 재확산, 남북한의 군사적 대결국면, 끝 모를 수출침체와 과 자영업계의 위기...역사상 유례없는 전염병의 역습으로 힘겹고 두려운 일상을 맞고 있는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지혜가 필요했다. 엄동설한의 2020년 신년 첫주부터 무더운 장마철인 7월초까지 장장 25주에 걸쳐 경기도의 항일현장을 찾은 이유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용기와 지혜를 20세기 선조들에게서 배우고자 함이다.
6개월 동안 경기도 30여 시·군에 산재한 항일현장을 찾으며 때론 절망과 분노를 느꼈지만, 고된 현실을 이겨낼 지혜와 희망도 만날 수 있었다. 눈덮힌 광주시 남한산성에 올라 1907년 8월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된 옛 절터를 밟으며 경복궁을 수복하려는 경기의병들의 결기를 느꼈다. 1898년 1월 1일 창의한 경기의병들은 광주시 ‘넓은 고개’(광현)에 매복했다가 일본 정규군 200명을 맞아 소중한 승리를 거두었다. 남한산성을 접수한 1600여 의병들이 고종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서울로 진격하려다 눈물로 산성을 내어주었다. 이후 산성내 9개 사찰이 모두 파괴돼 아직껏 5곳이 터로만 남아있다.
통한의 함락 이후 가장 가열차게 항쟁한 이들은 영국인 기자 멕켄지에 의해 소개돼 다행히 역사로 남은 양평(양근·지평)의병들이다. 머릿수건을 묶거나 망건을 쓰고, 상투를 틀거나 낡은 대한제국 군복을 입은 18세부터 26세에 이르는 의병들은 "일본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는 멕켄지 기자의 질문에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죽는 편이 일본의 노예로써 생명을 부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대답하였다. 1895년 창의한 이래 양평 출신으로 의병 참여자만 2천여 명에 이른다는 연구자료집을 발간하고, 전국 최대 규모의 의병묘역을 조성해 매년 의병의 날을 기리는 이들도 토박이 후손들이니 가히 의병의 고장이라 할만하다.
110년 전 러일전쟁과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군대 강제해산의 상흔은 아직도 경기도 전역에 아련히 새겨져 있다. 하루 수십만대의 차량이 오가는 성남시 백현동에 광주시와 용인~안성 일대에는 일본군과 싸운 남상목·윤치장 의병부대를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북부의 연천군에 13도 창의군을 이끈 허위 의병장과 연기우·심상우 부대 등 5천여 의병을 기리는 위령비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대표적인 전적지인 광주시 남한산성이나 용인시 굴원사와 안성시 칠장사, 연천군 심원사 등에 자세한 안내판이나 해설자료를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항일의 할아버지격인 의병을 찾다보면, 아들뻘인 3·1독립만세운동과 의열투쟁, 무장투쟁도 자연 이해할 수 있다. 작년 100주년을 맞으며 크고 작은 기념비와 공원이 생기고, 거리명과 안내판도 정비되고 있어 반갑고 감사했다. 하지만 아직도 안성시 원곡면에 1984년 세워진 ‘안성3·1운동기념관’만이 경기도 유일의 기념관일 뿐이며, 일본군 만행의 증거는 2001년 개관한 화성시의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서만 만날 수 있다.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이나 비석, 조형물과 기념공원 등은 경기도 골골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세워져 있지만, 지역 의병과의 연관성이나 만세지도자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여전히 아쉬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화성시의 3·1운동 만세길 조성이나 방문자센터 운영, 용인시민들이 세운 수지구 머내만세운동 표지석 설치, 만세고개·만세길·만세다리 등 거리명 바꾸기와 옛 지명 되찾기 등 지역주민들의 민족성 되찾기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향후 각 지역별 만세운동의 현황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안내소 설치와 만세항쟁지나 일제탄압의 현장(현 시·군청 및 경찰서)에 표지석 세우기, 지역별 만세운동 재현행사와 광복절 거리축제 등으로 진화한다면 지역문화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아 이천시 출신 이수흥과 양주시 봉선사 스님이던 김성숙 등을 발굴해 소개한 일은 의미가 컸다. 특히 안중근 의사보다 4년 앞서 을사늑약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했던 안양시 원태우 지사의 1905년 11월 22일 의거는 국내 의열투쟁의 시초로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원 지사의 거사가 성공했다면 안중근 의사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23세 젊은 지사를 갓 쓰고 도포 입은 수염 난 장년으로 묘사한 평촌 자유공원의 조형물이나 흉상 등은 의거를 폄훼하는 일이니 재고되어야 할 일이다. 의열단 간부 김성숙을 배출한 양주시 봉선사 입구에 친일문학가 이광수의 기념비가 아직 남아있는 건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반민족행위 1등급에 속하는 용인시 추계리 송병준의 별장터에 겨우 남은 전통연못을 재복원한다면, 식민잔재 청산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봉오동·청산리대첩 100주년과 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는 올해에는 경기도 출신 무장투쟁가와 광복군,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배움과 선양사업도 절실해 보인다. 삼한갑족으로서 전 재산을 팔아 독립군을 양성하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6형제의 유훈은 다행히 남양주 홍유릉 앞에 이석영 공원 조성으로 되살아나고, 대한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비롯해 임시헌장 등을 작성한 조소앙 선생과 가족 14명의 독립공적은 양주시 기념관에서 오롯이 만날 수 있다. 용인에는 만주 신민부 집행위원장을 지낸 김혁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교장 여준 선생, 3대 독립운동가문인 오광선 등을 기리는 비석과 표지석을 만날 수 있지만, SK하이닉스 건설로 쫒겨가야할 형편에 놓여있다. 대한민국 국무부장으로 광복군 창설에 기여한 조성환과 엄항섭 선생의 남한강변 생가는 기념관이나 한옥체험으로 재생되길 고대해 본다.
6개월동안 경기도에 산재한 항일투쟁의 현장과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 25회에 걸쳐 소개하면서 갖는 궁금증이 하나 있다. 왜 경기도에는 이 소중한 흔적과 위대한 분들의 정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념관이 없을까. 굳이 천안의 독립기념관이나 경북 안동의 기념관을 비교하지 않더라도, 이 많은 유적과 유물, 뜻과 말씀을 배우고 느끼며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기념관을 경기도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경기 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의 꿈을 꾸어보며 연재를 마치려 한다.
글 김명섭(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김기영(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www.joongb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