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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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용인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선양하기 위하여 매년 용인3.1절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용인의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용인의 독립운동가 선양학술행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용인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의 항복으로 1차 세계대전이 끝이 났다. 이 전쟁은 이전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상자와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전쟁의 종전으로 패전국의 배상을 비롯한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다. 이 강화 회의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은 패전국의 식민지에 대한 민족 자결주의를 포함한 14개조의 원칙을 제창하였다.

러시아에서는 1905년부터 러일전쟁의 패배에 따른 경제적 혼란으로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었다. 러시아는 1917년 레닌이 이끈 혁명 세력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레닌은 집권하자마자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을 지원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식민지 압박에 허덕이던 세계 약소민족들은 이 소식에 크게 고무되어 대표를 파리로 파견하였다. 우리 민족도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이 주도하여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이동휘 등 연해주의 사회주의 세력도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계승한 대한인국민의회를 결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제창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나 점령지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과 같이 승전국의 식민지는 이 원칙에서 배제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파리 강화 회의에 기대를 걸고 왔던 약소민족의 대표들은 크게 실망을 하고 돌아가서 직접적이고 강력한 반제투쟁을 전개하려하였다.

우리의 민족운동을 주도하던 세력들도 민족 자결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직접적 대일 항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대규모 민족운동을 추구하였다. 독립을 선언하고 대규모 민족운동을 통해 독립정부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해외에서 먼저 전개되었다. 1918년 12월에 발표되었다고 알려진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와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중인 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이 그것이다.

해외의 독립선언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고국에 전해졌다. 우리 민족은 국권 피탈이후 자행된 조선총독부의 무단 통치와 토지 및 자원의 수탈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컸다. 한편 1월 하순 고종의 죽음은 일제의 독살설로 번지며 대일 항쟁의 기운은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내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대규모 민족운동을 통한 독립선언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실행에 옮겨갔다.

3월 1일 서울과 지방 중요 도시에서 울려 퍼진 독립 선언의 함성은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으며 수많은 해외 동포들도 함께 했다. 고국에서 한창 독립 만세함성이 확산되어갈 때 연해주에서 3월 중순에 가장 먼저 대한국민의회라는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어 상하이에서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4월 23일에는 서울에서 한성정부 수립 선언이 있었다. 이밖에도 만주와 서울에도 다른 형태의 임시 정부 수립 선언이 있었다.

곧바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할 임시정부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한 통합운동도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 청사는 상하이에 두되 법통은 한성정부를 계승하고 연해주 정부가 주도하는 형태로 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용인 사람들은 1919년 국내외 독립선언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임시정부에도 적극적으로 함께하였다.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일본 동경 유학생들은 일제의 검속을 피해 일본을 떠나 귀국하거나 상하이 등지로 망명하였다.

용인 원삼면 죽릉리 출신 오의선은 당시 일본 명치대학 재학 중으로 2.8독립선언에 깊이 관여하였다가 일제의 검속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때 함께 망명한 사람들로는 이광수, 최근우, 신익희, 윤보선, 신석우, 주요한 등이었다. 오의선은 상하이로 망명한 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신석우, 정대호, 이기룡 등과 함께 경기도 대표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오의선은 4월 30일 개회한 4회 회의에서 의정원에 올라오는 법률을 심시하는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으로 홍진, 손두환과 함께 선출되었다. 이어 세칙제정위원으로 김동형, 이춘숙과 함께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7월 7일 개회한 임시 의정원 5회 회의에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는 새로 발족한 국제연맹에 파견한 한국대표로 이승만(대통령)·김규식(외무총장)·서재필 등을 선정하였다. 이어 7월 19일에는 김병조, 이춘숙, 오의선, 정인과, 최창식 및 외무위원 3명으로 하여금 연맹에 제출할 자주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케 하였다. 또 회의 중에 오의선은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타지에 있는 총장과 통신 문제와 중국과의 외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질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이해 8월 대한적십자회를 부활시키며 발기인으로 안창호 등 78인을 선출하였다. 또 회장 이희경과 오의선 외 20여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후 오의선의 임시정부 내의 활동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있으며 1920년 3월 3일 의정원 회의에서 의원 자격을 상실하였다. 오의선은 1921년 경 북경으로 옮겨 활동하며 박용만의 부하인 김복(김규홍)과 함께 임시 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귀국하였다. 기흥구 영덕리 출신인 이영선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 이시영과 함께 근무하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독립공채를 판매하기 위하여 국내에 잠입하였다. 서울에서 명륜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구성 언남리 출신의 어대선과 접촉하며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4년간의 옥고를 치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통합 정부를 추진하며 만주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에 특파원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 서간도의 한족회는 그 산하로 들어가 군정부 역할을 담당하기로 하고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때 원삼면 죽릉리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여준은 서로군정서의 부독판으로 독판 이상룡, 정무청장 이탁,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여준은 1920년 12월 4일에는 임시 정부 간서총판부가 설치되자 총판에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간도의 간북 대한의민단, 대한광복단, 대한국민회가 통합하여 임시 정부 의 지휘를 받는 총판부 성격을 가졌다.

임시 정부는 1920년 10월부터 일본군에 의해 만주 지역 수많은 동포들이 학살된 경신참변(간도참변)에 무기력하게 대응함으로서 이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뒤에 서로군정서는 1921년 4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함으로서 임시 정부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또한 간도의 민족 운동가들은 임시 정부가 외교론과 준비론에만 입각하여, 간도의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을 중시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서간도의 여준이하 3인과 북간도의 박재눌 외 13인은 상하이의 「독립신문」에 이에 대한 이유와 책임을 물으며 임시 정부의 처사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임시 정부는 초기부터 독립운동 지역과 노선을 둘러싼 내부 분열과 임시 대통령 이승만의 독선으로 그 역할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1921년에는 그동안 임정을 이끌어오던 국무총리 이동휘와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이 임정을 떠나며 심각한 존폐위기에 처하였다.

일부 독립운동 세력이 임정은 창립 당시부터 잘못되었으며, 수립 이후 무능과 알력으로 국민의 기대에 이바지할 수 없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전 국민의 의사에 기초한 통일적이고 강력한 정부 수립과 민족 독립운동의 방략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면서 임정에 대한 입장은 임정을 대신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고자 한 창조파와 임정의 잘못된 점만을 고치자는 개조파 및 임정 유지를 주장하는 임정 옹호파 등 크게 3갈래로 분열되었다.

1921년 5월 26일 여준과 김동삼의 주도로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액목현에 모여 회의를 열어 임시 정부의 개조를 주장하였다. 여준, 이탁, 김동삼, 곽문, 김진삼 등은 결의서를 작성하고 이에 연서하여 임시 정부에 보냈다.

  • 1 .현재의 간서 대의원을 통해 임시 의정원에 대하여 정부 개조의 필요를 제의함.
  • 2. 위임 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확실한 이상 해당 행위의 주창자는 퇴거를 명령할 것.
  • 3 .의정원에 제출한 개조 의안이 채택되지 못할 때에는 현재 간서 의원을 소환한다.
  • 4. 위의 의안이 결정되기 전에 본 기관 대표의 명의로 정부를 파괴하려는 제3단체의 참가를 허가하지 말 것.
  • 5. 서방에 대한 제의 또는 권고가 무효될 때에는 간서는 간서 자체를 보장하여 자퇴함.
  • 여준은 임시 정부의 개조를 주장하였으나 그 변화가 기대에 못 미치자 이상룡과 의논하여 액목현 황지강자에 한족회를 부활시켜 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으로 흩어진 서간도의 독립군을 규합하려 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의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만주사변(9.18사변)으로 일본의 괴뢰 정부인 만주국이 세워지며 이 지역에서 독립군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독립군 세력은 중국군과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여 일본군과 맞섰다.

오광선이 소속된 한국독립군은 쌍성보 전투와 대전자령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중국군의 비협조와 일본군에 비해 전력 약세로 만주에서 활동이 어려워져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1933년 10월 이청천과 오광선 등 39명이 산해관을 넘어 중국 관내로 가족을 데리고 이동하였다. 오광선은 1934년 2월 낙양군관학교에서 한인반 교관(총책임자 이청천)으로 초빙되었다.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중국 국민당 장개석과 면담해 광복군 중추 장교를 양성하도록 요청한 결과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의해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은 2기생(92명)을 배출하고 이듬해 4월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오광선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대일지하공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군관학교 졸업생들로 하여금 남경과 북경에 비밀거점을 마련하고 각 지역별 지하 조직망을 구축하여 동지규합과 정보수집, 요인암살 등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오광선은 1936년 일본 관동군 참모장을 암살하라는 특명에 따라 북경에서 금은방을 차리며 잠행하였다. 오광선은 마침 베이징에 들른 도이하라(土肥源) 중장의 암살을 준비하던 중 국내에 침투한 다른 공작원의 체포에 따라 북경 근거지가 노출되고 말았다. 1백여 명의 만주보안대와 일본경찰의 기습으로 오광선은 1937년 1월 2일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오광선은 신의주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가명으로 버텨 3년형의 옥고를 치른 후 1941년 11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만주에서 항일 유격대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은 오광선은 곧 상해로 달려가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을 만나 광복군 소장이 되어 국내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오광선이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룰 때 그의 가족들은 임시 정부와 함께 했다. 부인인 정현숙은 임시 정부와 노정을 함께 하며 임정 요원과 광복군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941년이후에 한국혁명여성동맹원이 되었으며 1944년 전후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맏딸인 오희영은 10대의 나이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였다가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오광심, 김효숙 등과 함께 여군으로 입대하여 제3지대에서 활동하였다.

1942년에는 김학규 제3지대장의 인솔하에 일본군의 점령 지구를 돌파하여 오광심·지복영·신송식 등과 함께 중국군 유격부대가 자리잡고 있는 부양(阜陽)에서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부양에서 군사 교육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단의 1기 졸업생들과 함께 남편이 될 신송식의 인솔 하에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하였다.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주석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으며 그곳에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둘째 딸인 오희옥도 1939년 4월에 유주(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창설되자 입대하여 일본군의 정보 수집 및 일본군에 징집된 한국인 사병의 광복군 모집과 위안 활동을 하였다. 광복 직전에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TEL: 031-324-9600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중부대로 1199, 3층(삼가동, 용인문화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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