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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희옥 여성 독립운동 지사를 <경기 신흥무관학교 교관 양성과정> 자율연수에서 가슴으로 만나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2020-10-05 10:40:43

조회수 : 21회

2020년 9월 26일(토) 경기 신흥무관학교 교관 양성과정 교육을 받는 중에 오희옥 독립운동가 후손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날 연수 계획은 원래 천안 국학원에 직접 방문하여 국학운동사와 단군의 홍익정신을 새롭게 느끼고, 오희옥 독립운동 지사와의 만남을 하기로 하였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온라인이라는 아쉬움이 컸지만 진심은 통하는 법입니다.

온라인 상이었지만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져서 저를 포함하여 많은 선생님들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오희옥 지사가 독립 후 40여년 간 교직생활을 하셨다는 이야기에 더 많은 공감이 형성되었습니다.

7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존경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독립운동 지사님들 이야기가 더 많이 더 멀리 퍼져나갈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교사로 노력하겠습니다.

▶경기도뇌교육연구회 자율연수에서 오희옥 독립지사 큰 아드님께 오지사 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님들

오희옥 독립운동가님의 배경을 잠시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 내용은 오희옥 독립지사님의 큰 아드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Ⅰ. 3代의 독립 활동

*배경: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의 '갑오 변란'에 동학 농민군의 거세와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 시 전국의 의병 봉기,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 상실 시 유생과 농민 중심으로 의병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독립, 광복운동으로 계승발전됨.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을 주도한 세력들은 독립운동의 공간을 국내에서 국외로 확장.

오인수 증조부(1868~1937)께서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시 용인, 안성 등에서 의병 100여 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싸우던 중 친일파(정미 칠적, 송병준 아들 송동헌) 밀고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여 년간(1908~13)을 복역하신 뒤 만주에서 활동 중인 아들을 찾아 망명 및 그 후 독립운동 지속 전개

*정미 7적: 정미 7조약에 찬성한 내각 대신(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도중 몽, 이재곤, 임성준)

*을사 5적: 을사 늑약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이완용, 이근택, 이 지용, 박제순, 권중현)

*刑 服役 후 만주로 망명, 1937년 사망(아들이 신의주 형무소 복역中)

*오희옥 지사의 회고

“할아버지는 3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고, 당시 의병들은 주로 농기구를 들었으며 일본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였지.

전투가 끝나고 한밤중에 집에 오다가 잠복 중인 일본군에게 붓 잡혔고,충성스런 사냥개는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었지. 아버지는 당시 열한 살이었고 죽은 사냥개를 끌어안고 일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데”

“할아버지는 만주사변 후 우리랑 만주에서 북경으로 옮겨가 1년을 사셨는데 늘 설사를 달고 사셨어. 북경서 살다가 만주(황무지 개척한 농토 관리, 독립군 식량 조달 등)에 계신 할머니께 가셔서 사시다가 돌아가셨어. 감옥에서 온갖 고문에 옥고 후 많은 지병을 갖고 사셨기에 어린 마음에도 안쓰러웠었지"

오광선(1896~1967, 독립장 1962) 조부께서는 신흥무관학교 졸업, 독립군 양성 교관 및 숱한 항일 전투를 치렀고, 활동 중 '밀정'의 제보로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1937~1940. 11월까지 3년간 복역(온갖 고문 後 死로 판명되어 가족에 葬禮 인도) 하셨고, 해방 後 국내 지배 사령관을 역임하셨음.

*약력: 신흥무관학교 졸업과 교관, 서로군정서 별동대장 및 경비대장,대한독립군단 중대장, 의용군 중대장, 독립군 특별반 군 간부 양성교관, 해방 후 1946년 한미 호텔에 국내지배 사령부 설치 후 국내 지대장(사령관)으로 하지 중장과 임시정부 요인 환송 문제, 광복군 재편성(활동 등) 논의 및 ‘대 한국군 준비 위원회, 광복 청년회, 대동청년단’창설

*안중근(1909), 이봉창, 윤봉길(1932) 의사처럼 목숨 바쳐 일제 수괴 제거를 요청했으나 김구 선생께서 주어진 역할 책임론에 뜻을 굽힘. 그 후 1936년 일본 관동군 참모장 도이하라 겐지 중장 암살 시도

*오희옥 지사의 회고

“스무 살 때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셨고, 수석으로 졸업하셨지. 교관 역할도 하면서 밀정에 들키지 않기 위해 이름을 바꿨어. 조선을 빛낸다는 뜻으로 오성 묵음 오광선(光鮮)으로 변경했지”

“2만여 리를 걸어서 자유시 참변을 알림”

→ 2~3회 죽을 고비 넘기고, 한 달 반 동안, 때로는 맨발로 걸었다.

→ 정신력과 체력이 일반 사람보다 2~3배 강인하셨다.

정현숙(1899~1992, 애족장 1995) 조모께서는 임시정부 가족 중심이 창설한‘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활동 및 한국 독립 당원으로서 중국 땅 곳곳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 임무 등을 수행

●독립군의 가족 마을 돌봄

“독립군과 멀리 떨어진 채 노약자 및 아낙네들만 모여만주 벌판의 황무지 개척하면서, 추수 때 온갖 마적단의 침입 時 적절한 대응을(마을 대표로 수확 식량 배분 담판) 하였고, 주변의 눈을 피해 독립군에게 식량 지원하기 위해 몇 십 개의 심장이 있어도 부족했었다”

→ 40여 년 전 제가 초, 중학교 시절부터 몇 차례 말씀

→ '봉오동 전투' 속에 한인촌의 일본군 만행

*오희옥 지사의 회고

“어머니는 키가 크고 건장하셔서 쌀 한 가마니를 잘 지고 다녔어 한 번은 독립운동가 조경한을 쏘려는 사람을 꽉 붙잡아서, 목숨을 건진 사례가 있었지”

*오희옥 지사의 조카 회고

“정정산 할머니는 만주에서 독립군에게 하루에 12가마솥 밥만 해준 것이 아니라 말도 키워서 좋은 말은 독립군에게 제공, 남은 말은 팔아서 군자금에도 보탰었죠”

*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오광선 장군·정현숙지사 부부를 '20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전쟁기념관은'15년 5월 호국의 인물로 오광선 장군 선정)

오희영(1924~1969, 애족장 1990) 이모는 모친과 함께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거쳐 1941년 광복군 3지대에서 맹활약 하셨지요. 광복군 3지대는 영화 ‘암살’에서 그 역할이 나와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 1936에 일본군에게 체포된 부친(오광선 장군)과 소식이 안되어 3지대에서 활동하면서 행방을 찾겠다는 기개로 임하였고, 그곳에서 남편(신성식 지사)을 만남

* 지복영 지사 회고록에 “희영이는 어리지만 혹독한 겨울의 천리행군 時에도 뒤 처지 않은 야무지고 당찬 성격이었다”

* 광복군 시절에 혹독한 환경, 굶주림 및 처절한 훈련 등은 광복 이후 합병증을 얻음

신성식(1914~1972, 독립장 1963) 이모부께서는 조선 의용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셨고, 중일전쟁에도 참여하셨습니다.

*193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 졸업 후 1941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참령 으로 활동 및 1945년 6월 임시정부 주석 비서로 활동하였고, 광복 후 대만 중국국민당의 국방부에서 활약하기도 함

Ⅱ. 오희옥 지사께서는 10대부터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위험한 첩보활동을?

당시 기약할 수 없었지만 조국 광복이 꿈과 희망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목표의식이 뚜렷했었지요.

공식적인 활동은 1939년‘한국광복 진선청년 공작대’에 입대하여 군사정보 수집, 초모 활동 및 항일 의식 고취 계몽활동을 하셨으며, 1941년에는 광복군 5지대에 편입되어 첩보활동, 민족문화 전파 활동을 하셨고, 1944년 한국 독립 당원으로 활동

* '말모이, 항거, 모던보이' 속에 힘겨운 독립운동의 면모

●다재다능한 기질 활용

→ 중국 중경에서 중학교 시절 중∙고 체육대회에서 수영에 출전하여 3등 동상 수상, 당시 중국신문에 게재

∙내용: 중국인이 다수이고, 고등학생에 비해 신체조건이 열악한 한국인 여학생이 3위 하였다.

∙그 신문을 백범 김구 선생께서 제일 먼저 보시고 많은 이들 앞에서 칭찬을 해 주셨다고 모친께 들었음

니다.( 나라 잃은 힘겨운 시절에 작은 기쁨~ )

*'자전거 왕 엄복동, YMCA 야구'에서 민족적 일체감과 자긍심 고취

→ 2017년 광복절(72,75주년) 행사시 임시정부 시절 애국가를 세종 문화회관에서 당시 91세의 연세로 독창,

애국가 부르시는 울림에서 임시정부 시절의 고난과 고통,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소망 등을 느낄 수 ~

→ 2003년 70대 후반에 서예활동을 시작하면서 경기도 및 전국 서예활동 대회에서 많은 수상을 하였고,

하루 30분 이상 EBS 중국어 강좌를 학습하는 등의 열정을 보이심(기본적인 중국어를 기억~)

* 오희옥 지사의 회고

“열여섯 살쯤부터 망종이에 서예를 쓰는데 하루는 김구 선생님이 오셔서 큰 글씨를 쓸 때는 팔을 들고 써야 한다. 그런 훈시를 받기도 했지. 月湖란 호를 김구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지”

Ⅲ. 독립을 위한 헌신, 그 공로 인정이 미약?

독립운동하셨던 많은 분들과 유족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컸던 것은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경제적으론, 김구 선생님께서 과거 언젠가 말씀하신 것처럼 3대가 독립운동한 가족에게는‘직업이 독립운동’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바쳤으나, 해방 후 삶의 터전에서 정부의 적절한 보상이 미미했고 서훈 또한 지연되어 생활이 궁핍하고 매우 어려웠으며(특히 조 모, 이모는 모두 사후에 서훈, 증조부는 서대문 형무소 수감 기록 전소로 미 표창),

정신적으론, 친일세력 후손들이 별다른 제재 없이 권력과 부를 세습하여 지금도 더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 품었던 가치관의 상실과 괴리감은 매우 컸었지요~

* 역사를 바로 알고 반성하며, 오늘을 직시하고 현명한 미래를 준비

* 일제 치하에서 위기에 처한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들을 돕는 것을 주저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 제국주의의 총칼에 맞서 항일 전쟁에 목숨 걸고 뛰어든 독립운동가들은 전 세계의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 선상에서 연구하고 기념되어야 함

Ⅳ. 오희옥 지사의 독립운동과 삶?

3대에 걸친 독립운동은 태생부터 운명적인 만남이었으며, 혹독하고 척박한 환경은 추위와 배고픔을 느끼게 하였고 나라 잃은 타국 생활은 서러움과 절망 속의 어린 생활의 연속성이었기에 일본에 대한 증오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은 더 강렬했었지요.

초등학교 시절 이전에 만주 생활은 어머니(정정산 지사)의 억척 같은 황무지 개간과 가축 육성으로 여유롭게 생활했으나 만주사변, 중일전쟁 시에 초, 중학교를 다녔고, 그 기간 중엔 아버지(오광선 장군)가 일경 체포된 후 8년여간을 어렵게 어머니의 고달프고 힘든 노동으로 하루하루 연명하였지요.

임시정부의 잦은 이전으로 몇 차례 중국 학교를 전학 다니면서 이를 악물고 노력하여, 공부와 예체능에서 남들 보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셨지요. 청소년 시기에 첩보, 계몽, 초모 활동 및 의식 고취 연극, 문예활동을 하면서 뼛속 깊이 조국의 독립을 갈망했고 광복이 되기까지 가장 큰 소원이었지요.

불완전한 광복은 6.25의 비극을 남겼으며, 정통성 없는 대한민국 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또 한 번 서러움과 가치관의 상실을 느끼면서 중장 노년의 시간을 지내셨기에 자식의 입장에서 모친에 대한 존경스럽고 감사함이 존재하면서도 정부에 대한 원망과 안타까움이 듭니다.

Ⅴ. 용인 고향으로 오시게 된 사유?

용인 원삼면에는 해주 오 씨 종친회가 있고, 40년 교직생활 중 첫 부임지가 고향인 원삼면에서 4년여간 생활하셨기에 연세가 드시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매년 용인시의 각종 행사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셨었지요. 그러던 중 해주오 씨 종친회에서 종친회 땅을 기부했고, 용인시민의 재능기부와 시장님을 비롯한 용인시 공무원들의 따뜻하고 배려 있는 후원이 있었습니다.

* 원삼면 죽능리 일대는 해주 오 씨 종친회가 550여 년 동안 집성촌을 유지하고 살았으며, 현재도 100여 가구가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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