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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대한민국 전쟁영웅] ‘국군 정통성의 상징’ 오광선 장군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2022-02-10 11:34:04

조회수 : 1,125회

신흥무관학교부터 독립·광복군과 국군까지
국군 뿌리가 되고
아버지 이어 부부·자녀까지 3대가 독립운동
독립혼 꽃피우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서로군정서 독립군 중대장 활동
자유시참변으로 소련 공산당 감옥서 수감생활 겪어
대전자령전투에서 독립군 최일선 지휘관으로 참전
김구 주석 지시 따라 베이징 비밀공작대 조직 임무
광복군 국내지대장 임명…정부 수립 후 국군 입대
6·25전쟁서도 활약…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국립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오광선 장군  묘소.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부인 정현숙(이명 정정산)도 합장되어 있다.  한재호 기자

국립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오광선 장군 묘소.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부인 정현숙(이명 정정산)도 합장되어 있다. 한재호 기자

국군 대령으로 6·25전쟁에도 참전한 오광선 장군.

국군 대령으로 6·25전쟁에도 참전한 오광선 장군.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일대의 고개인 대전자령 모습.이곳에서 1933년 6월 30일  한국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일대의 고개인 대전자령 모습.이곳에서 1933년 6월 30일 한국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모습. 사진에서 가운데 줄 오른쪽의 여군이 오광선 장군의 딸 오희영이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모습. 사진에서 가운데 줄 오른쪽의 여군이 오광선 장군의 딸 오희영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100년의 전쟁역사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지어진 뒤 1948년 정식 정부 수립 후에도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산하로 편입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였다. 100년이 넘는 전쟁역사의 출발점이다.

이에 국방저널(국방일보)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지난 100년간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싸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전쟁영웅을 재조명하고 있다. 2월호의 주인공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이 되어 평생 조국을 위해 전장에서 싸우며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을 이어온 오광선 장군이다. 글=정호영 기자/사진=국방일보 DB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

지난 2020년 11월 5일 육군교육사령부 대강당에서 청산리전투 100주년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1920년 만주에서의 ‘항일무장독립전쟁과 국군의 정통성’을 주제로 민·관·군 각계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석,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기자는 이 자리에 토론자로 참석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군대가 바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군인 만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인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당시 세미나 참가자들은 이러한 기자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의병이나 신흥무관학교까지 국군의 뿌리로 봐야 한다는 일부의 의견도 있었다.

기자는 개인적으로 의병은 정부의 군대가 아닌 만큼 국군의 뿌리로 보기 어렵지만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고려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자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을 2년째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광선 장군

오광선 장군


 
평생 조국 위해 군인의 본분을 다하다

대한민국의 전쟁역사에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 이르는 한길을 걸은 군인은 극히 드물다. 앞서 소개했던 김홍일, 이준식, 최용덕 장군이 그 주인공이다. 여기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의 길을 걸은 군인은 단 한 사람으로 좁혀진다. 그가 바로 오광선 장군이다.

오광선은 3대가 독립운동을 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도 흔치 않은 가문의 일원이다. 부친 오인수는 의병을, 오광선과 부인 정현숙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자녀인 희영·희옥·영걸 남매는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했다.

일찍이 부친을 통해 독립운동에 눈을 뜬 오광선은 1917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이 됐다. 서로군정서에서 독립군 중대장으로 활동한 오광선은 자유시 참변으로 소련 공산당의 감옥에 갇혀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극적으로 감옥을 탈출해 상해 임시정부에 이러한 참변을 알림으로써 지청천 등 독립군 지휘부가 감옥에서 풀려나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광선은 1930년대 초중반 만주벌판에서 말 달리며 일본군과 싸웠던 전설적인 독립군으로 맹활약했다. 1930년 7월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사령관 지청천)이 창설되자 중대장이 돼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교관을 거쳐 일본 관동군 참모장 암살을 준비하던 중 체포돼 옥고를 겪었다. 8·15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총사령관인 지청천의 명령에 따라 광복군 소장이자 국내지대장 자격으로 미군정 당국자를 만나 광복군을 정식 군대로 인정하고 입국시켜 달라고 담판을 짓기도 했다.

오광선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뒤늦게 국군에 입대해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주지구위수사령관 등을 지내며 북한군과 싸웠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의 일원이 돼 평생을 조국을 위해 군인의 본분을 다했던 오광선 장군을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에서 재조명한다.


독립운동 위해 군인이 되다


오광선은 1896년 5월 13일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어현(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어현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오인수는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소문난 포수이자 의병이었다. 그는 같은 마을 출신으로 일찍이 독립운동을 하던 여준이 고향 죽능리에 삼악학교를 세우자 아들 오광선을 그곳에 다니도록 했다.

1907년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키자 이에 대한 반발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부친 오인수도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벌이며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돼 수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오광선은 1913년 삼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이웃 마을의 정현숙과 결혼했다.

오광선은 이후 서울로 상경해 종로에 있는 상동청년학원에서 공부를 하다 1915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북경에 도착한 오광선은 독립운동가 신규식의 소개를 받아 중국의 보정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6개월간 폭탄제조법은 물론 각종 훈련을 받다가 중국 내전의 영향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북경에서 만주까지 장장 700리 길을 걸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오광선은 1918년 12월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지청천이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육훈련대장으로 부임하자 학교로 복귀해 교관이 됐다. 또 만주 서간도 일대의 독립군부대인 서로군정서의 중대장으로도 활약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부대는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됐다. 이때, 오광선은 대한독립군단의 중대장으로 임명됐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5월에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 공산군(적군)의 도움을 받기 위해 러시아 자유시로 들어갔다. 반면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과 이범석 등은 반대해 합류하지 않았다.

1921년 6월 러시아 공산군이 독립군을 강제로 무장 해제하며 공격한 자유시 참변이 벌어졌다. 오광선은 상관 지청천과 함께 체포됐다. 이후 지청천 등 간부급 84명과 함께 중범죄자로 지정돼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혹독한 수감생활을 했다.

오광선은 수형 생활의 참상을 만주의 동료 독립군에게 전달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형무소를 탈출했다. 이어 흥안령 북쪽을 돌아 시베리아를 거쳐 밀산에 도착해 김좌진과 재회했다. 김좌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에게 이를 보고했고,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전을 마무리한 소련의 레닌은 1922년 8월 지청천 등 독립군 간부들을 석방했다. 오광선이 없었더라면 자유시 참변 등 독립군의 비극은 영원히 세상에 묻혔을 뻔했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재개하다


오광선은 1930년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관 남대관, 참모장 신숙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을 벌였다. 그는 1931년 12월 11일 지청천을 수행해 중국 호로군 사령관 정초를 만나 한·중 연합군을 구성한 뒤 만주사변을 단행한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흔히 우리가 아는 만주벌판에서 말 달리며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군의 전설과 무용담은 이 시기를 말한다. 중국 연변 등에 거주하던 조선족들은 이러한 독립군의 활약에 ‘선구자’와 같은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응원했다.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벌였던 대표적 독립군부대는 한국독립군(총사령 지청천)과 조선혁명군(총사령 양세봉)이다. 이들은 경박호, 쌍성보, 사도하자, 홍경성 등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군과 전투를 벌이며 독립군의 투혼을 널리 알렸다. 이중 1933년 6월 말에 있었던 대전자령전투는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대전자령은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일대의 고개다. 높이는 해발 800여 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꾸불꾸불한 계곡길이 5㎞ 정도 이어지고 고갯길 양쪽 길가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연의 매복지였다.

한국독립군과 중국군 시세영부대는 1933년 6월 25일경, 대전자에 주둔 중인 일본 19사단 소속 간도파견대(연대급 부대)가 연길현으로 철수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한·중 연합군은 3일간 100㎞를 행군해 28일경 대전자 북방 노모저하에 도착했다. 이 작전에 한국독립군은 약 500여 명, 중국군은 약 2000여 명이 참전했다.

한·중 연합군은 부대를 3곳으로 나눠 각 요지에 배치했는데, 공격의 주공은 한국독립군이 담당했다. 연합군은 이곳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며 30일까지 매복했다. 30일 아침 6시경 일본군은 많은 장비를 가지고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했다. 오후 1시경 일본군 전초부대가 대전자령 깊숙이 들어왔다. 일본군 후미가 산중턱에 이르렀을 무렵, 한·중 연합군은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대부분 총탄에 쓰러졌다.

4시간의 격전 끝에 한·중 연합군은 일본군 1000여 명을 살상하고 군수품 200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500정, 담요 300장 등 막대한 전과를 거뒀다. 이 전투에서 오광선은 한국독립군 일선 지휘관으로 맹활약했다. 그런데 전리품을 독립군과 중국군이 분배하는 과정에서 불화가 생겨, 이후 연합은 깨지고 말았다.

대전자령전투는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사상 최대의 승전이었다. 이전까지 주로 만주국군을 상대로 싸웠으나 이 전투는 정규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대규모 작전이었다. 승전 뒤 일본군이 증강됨으로써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대전자령전투는 무장 독립군의 이념과 정통성을 임시정부 계열로 계승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대전자령전투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목표와 성과가 임시정부로 본격 수렴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김구의 제의에 따라 이청천·오광선·공진원 등 독립군 간부들은 이듬해(1934) 개설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 분교에서 한인특별반의 군사훈련을 맡게 되었다.

이청천의 총책임 아래 이범석이 제17대 대장, 오광선·조경한 등이 교관으로 실제 교육훈련을 주관했다. 특별반은 2년제 정규 군사훈련 과정을 이수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제1회 졸업생만 배출하고 사정상 문을 닫아야 했다. 비록 1년 남짓밖에 유지되지 못했지만 여기서 훈련받은 한인 청년들은 뒤에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을 이루게 됐다.


광복군과 국군의 길을 가다

오광선은 1936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으로 파견돼 비밀공작대를 조직했다. 그러던 중 일본 관동군 참모장이 베이징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암살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곧 발각돼 일본 경찰에 붙잡혀 2년간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38년 10월에 출옥한 오광선은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1945년 8·15 광복 소식을 접한 오광선은 상해로 가서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만났다. 지청천은 오광선에게 광복군 소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국내지대장으로 임명했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미군정 당국과 협의해 광복군을 정식 군대로 인정받고 국군 자격으로 입국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귀국해 미군정청과 담판했다. 그러나 미군정청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은 실패했고, 그는 직접 전용 항공기로 중국에 가 김구 주석을 모시고 귀국했다.

오광선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뒤늦게 국군에 입대했다. 1948년 12월 7일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 1차로 입교해 이듬해 1월 1일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제주지구병사구사령관,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했다. 1967년 5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오광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6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으로 이어진 국군 정통성의 상징인 오광선은 국군의 역사이자 자랑스러운 전쟁영웅이었다.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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