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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독립운동] 여성광복군 오희옥여사(1926~2024)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2019-01-06 13:09:10

조회수 : 4,2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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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3대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6년 만주에서 태어나 1930~1940년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 1941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 대원,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당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24년 기준 유일하게 생존한 여성 독립운동가였으나, 순국선열의 날인 11월 17일 오후 향년 9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 생애 

 어렸을 때부터 의병장이었던 할아버지 오인수에게 정신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태어난 곳인 액목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해 1918년 신흥무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가 아버지 오광선 장군이었다. 또한 어머니 정현숙 여사는 만주 생활 동안 억척같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가축을 사육하면서 독립군에게 식량을 조달했다.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모은 살림은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쓰였다. 이처럼 3대에 걸친 독립운동은 태생부터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19394, 13세의 나이로 언니 오희영(1924~1969, 애족장)과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했다. 오희옥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전단을 배포해 한인 사병들을 포섭해 탈출을 유도하는 초모(招募) 공작 활동, 가두선전 등을 하였다. 그리고 최전방으로부터 전해 들은 일본군의 만행을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으며, 한국 청년들과 중국 청년들이 연합하여 반일 사상을 고취하는 연극·무용 등을 해서 돈을 벌었다. 비록 선전 활동에 그치기는 했지만, 피난처에서 이뤄진 위문 공연 등의 활동은 임시정의 조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무엇보다도 한중 양국의 항일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환기시킴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

 

 청년공작대 활동은 뒷날 한국광복군으로 연결되었다. 오희옥은 194111일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어 임시정부 요인과 최전방에서 독립군으로 복무하는 조선 청년들을 연결하는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성인에 비해 일본군의 의심을 덜 받는 10대 소녀였던 오 지사는 광복군에게 쪽지나 편지 등 밀서를 직접 전달하거나 일본군을 대상으로 첩보활동을 하는 등 군사정보수집에 힘썼다. 자칫 실패하면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두려움과 어려움이 닥친 순간도 많았지만, 본인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과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으로 매번 두려움을 떨쳐내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한다. 이후 1944년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20세인 19461월 임시정부 각료들과 귀국길에 올랐다. 충칭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간 뒤 기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 최종적으로 19467월 부산에서 인천으로 귀환했다. 고향 땅을 밟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당시 귀환하자마자 태극기를 보고는 일제의 탄압 속에 태극기를 숨겨야 했던 과거가 떠오르면서, 나라를 되찾았다는 사실에 아주 기뻤다고 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군이 계획했던 일들을 실행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직접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아쉬움도 들었다고 회상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서울에서 부친의 고향인 용인 원삼면으로 피난가는 중 북한군에게 검열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원지역 초등교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용인 원삼초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청룡분교(현재 폐교)로 발령받아 8년간 근무하였다. 결혼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인왕초, 홍제초, 홍은초, 은평초, 수색초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희옥은 교직 생활을 하며 학생들과 현충원 참배를 하는 등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 및 나라사랑 정신을 열정적으로 전했다. 38년 교직 생활을 끝으로 1991831일 고은초등학교에서 정년퇴직했다. 퇴직 때 대한민국 목련장을 수여받았다.


 정년퇴직 이후에는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학자 및 시민들과 교류하고 각종 보훈 행사에 참여하여 많은 이에게 독립운동의 역사와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알렸다. 특히 해마다 광복절이면 경축행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숨겨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고, 여성들의 권익 신장과 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서는 활동도 많이 하였다.


 2017년부터 특히 보훈 행사 참여가 많았고, 20183월 중순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다가 317일 급성 우뇌경색으로 쓰러져 중앙보훈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투병생활 중에도 서예작품을 통해 나라 사랑을 표현하는 등 활동을 보였다. 보훈병원에서도 붓글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약 6년 반의 투병 끝에 순국선열의 날인 지난 20241117일 오후 향년 9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1120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충혼당에 안장되었다. 만주벌을 호령하던 아버지와 오랫동안 헤어져 살아야 했던 오희옥은 사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 오희영 지사 곁에 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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